.






미묘한 간극에서의 표류


 "궁극적으로 ‘ ‘우리라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동시에 집단적 정체성에 대한 의문들을 
끊임없이 분할하며 동시에 합치한다." 




  


전시공간에 들어서면 통유리 밖에 경근당과 옥첨당의 처마선 그리고 등선이 형성하고 있는 선적인 풍경이 강하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창밖의 화면에 고정되고, 이후에 작품들로 옮겨진다. 이번 호아드 갤러리에서의 전시는 작품만을 위한 화이트큐브공간이 아니다. 강한 인상의 통유리의 화면은 작가들에게, 특히 예민한 색과 선을 다루는 회화 작업을 하는 작가들에게는 기피의 대상이다, 하지만 우병윤 작가는 창밖의 강렬한 풍경을 전시의 주제인자연스러운,너무나 자연스러운 관한 암시와 함축으로 인식한다.

 우병윤은 자연율에 대한 인식을 , , 면이라는 세상만사를 형성하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구성요소에 집중한다. 서구문명은 직선적 성격의 종교나, 원근법이라는 선적인 세계관을 이루지만 동양의 세계관은 원형의 세계관을 형성한다. 서양의 사고방식은 소실점을 향하여 끝없는 질주를 하며 망막주의적 사고관속에 존재하지만, 동양은 끊임없이 자연을 체화하며 윤회의 사유를 이어간다. 작가는 이러한 원형의 세계관에 주목하고 끊임없이 세분화되며 동시에 일체화되는 이질적인 현상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작가는 동시대의 대한민국, 우리라고 인식되는 지리적, 문화적 특정 집단이 갖고 있는 정체성과 정서에 대한 탐구를 화면위에서 진행한다.

 실로 허약하고 얇게 눌린 점과 선은 화면 내부에서 체계적 리듬감을 형성하며, 뒤로 밀려난 색채는 면으로 이루어져 동양화의 여백으로의 환유한다. 묽게 채색된 여백은 형상을 화면위에 존재시킬 뿐만 아니라 정신적 고양을 유발 시키는 듯하다. 화면위에 있는 감각을 위한 장치들은 추상표현주의 풍의 채색과 점으로 분할되어 여백으로 채워나간다. 동시에 외부적 사물을 재현한다는 의무에서 해방되고 내면을 위한 채색이라는 추상표현주의의 색채 위에 바위 혹은 산수로 인지되는 색면과 선을 올린 것은 단지 작가 자신만의 추상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형상은 관객들에게 인식의 왜곡, 추상이 아닌 구상으로 사유의 연성작용을 유발시킨다.

 작가의 화면은 관객의 내러티브를 변조하는 장치이다. 추상작업이지만 관객들은 형상을 문화적, 교육된 관념으로 인하여 완전한 구상 혹은 전통적 회화로 인지한다. 그의 작업은 개개인의 내러티브를 틀어버리는 것이다. 관객은 색채와 선을 통해 관습적으로 만들어진 관념의 이미지를 생산한다. 작가는 데자뷔의 균열을 일으키고 익숙함에 대한 패러독스를 제시하며 끊임없는정체성 대한 장고를 제시한다. 
 우병윤은 우리에게 데자뷔, 어디서 듯한, 익숙함에 대한 변곡점을 제시하는 동시에 개개인이라는 정체성은 점으로 세분화되지만 이는 다시 선과 면으로 치환되듯 결국은우리라는 원형으로 형성된 집단체적 정체성을 이루어 가는 현상에 관한 작업을 진행한다. 

 작품 <우리> 불안정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정장소에서 수집된 나무판에는 마다의 압력과 속도감으로 빼곡히 선으로 채워져 헤링본 패턴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균질성을 패턴위에 무심한 주윽 그어진 선은 동양의 전통적 회화인 산수의 암시적 유추를 가능하게 한다. 작가는 관객들에게 필연적으로 부여된 대한민국이라는 특정 장소와 문화적 정체성에 의문을 선을 통하여 제시한다. 관객은 저마다의 사유와 정체성을 갖는다. 하지만 묶여버린, 덩어리의 정체성을 부정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작품을 동양인이 바라본다면 전통적 회화 연장선상으로 인식할 것이고, 서양인의 관점에서는 그저 그어진 불과할 것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급진적인 서구문명의 개방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작가들은 전통과 서구문명 사이에서 표류하게 된다. 단절된 전통에 대한 갈망을 캔버스, 유화와 같은 서구문명의 생산물을 동양의 세계관과 혼합하여 정체성에 대한 담론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상 단일민족, 단일정체성에 대한 존재여부가 불확실하며 특정집단에 대한 규정은 정체성 부정과 유목주의가 팽배한 동시대 현대사회의 대한민국, 더불어 작가들 또한 노마드적 정체성에서 자유로울 없다. 
 과거의 채집과 수집은 생존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동시대의 극단으로 치달아 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집의 행위는 자신의 미적 취미를 형성하고 과시하며, 욕구에 대한 집합체이다. 욕구에 의해 생산되어져 소요되고 버려진 것들을 재활용하는 우병윤은 한국이라는 특정장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한국 작가들과 개개인들의 정체성에 관한 고찰을 노마디즘과 연결하여 한국 고유의 정서의 균열과 간극을 탐구하고 있다. 








 작품 <공명> 단순한 , , 면을 유동적이고 변화하는 직물을 통하여 틀에 고정된 캔버스라는 사각형의 논리에서 벗어난다. 화이트 큐브에 부착되어 기생하는 캔버스 작업들과는 달리 유약한 하나에 의지해 있다. 못이라는 단단하면서 작은 물체위에 끈으로 걸쳐진 작업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불안정하고 뒤섞여버린우리라는 정체성이 소유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메타포로 해석할 있다.   
 흔들리는 천위에 작가는 얄팍하고 매끄럽게 그어진 선과 묽게 칠해 서로 얽히고 완급 조절된 점은 신체의 개입을 통한 작가의 개념과 사유를 실체화한다. 이러한 선과 점은 서로간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면으로 치환된다. 치환된 면은 다시 점과 선으로 분해되고 반복적으로 결합하여 면으로 회귀한다. 끝없이 진행되고 반복되는 현상은 작가 내적정서의 환원이다. 
 또한 전시장 내부의 관객들 혹은 인위적은 열과 바람에 의해 작품은 뒤틀리며 시간성과 우연성의 개입을 통해 변주된다. 그렇다 삶은 우연성의 연속이고 고정된 시간은 존재 하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며 동시대의 모든 사물, 형상, 개념, 존재들은 뒤섞이며 유동적인 것이다.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 또한 마찬가지이다. , , 면이라는 매체를 사용하며 위태롭게 걸려있는 천은 어떠한 본질도 말하지 않는다. 단지 작가의 예술적 사유를 매체를 통해 외치고 있는 인상이다. 이러한 인상은관객들이 주체적으로 해석 여지를 부여하며, 작가의 심상을 추상이라는 형식을 통해 표명하고 있다. 

 관객들은 수많은 주관적인 수식과 알리바이를 작품 속에 집어넣는다. 결국 작품은 개인의 내면에서 끝없이 해석될 수밖에 없다. 많은 미술작품은 결국 개인의 필터 속에서 정제된 것이며, 어떠한 체계와 정체성에 대한 결론은 개인만의 방식으로 도출된다. 앞서 말한 작가의 작업 장치들을 통하여 궁극적으로우리라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동시에 집단적 정체성에 대한 의문들을 끊임없이 분할하며 동시에 합치한다. 우병윤은 결국 정체성과 개인의 내면에 대한 장고를 동양의 이치를 차용하며 끊임없이 내면을 추상작업으로 표출한다. 








 전시장의 인상은 작품 <공명> <우리> 완성하기 위한 습작들로 보여 진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다분히도 서구의 색면추상주의와 한국단색화를 연상시킬 수밖에 없다. 형식적으로 공명과 우리는 다소 다른 어법을 보인다. 이러한 미묘한 간극과 표현방식의 확립 또한 작가가 가져가야할 개성적 요소로 치환시켜야 한다. 작가는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체계화하고 이를 예술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예술에 대한 관념, 표현방식의 확장, 나아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맥락으로 표출해야 한다. 하지만 작가의 너무 많은 의미부여와 수식은 작품에 대한 알리바이일 뿐이다. 특히 회화에서 과도한 해석은 작품만의 형식에 제약을 주기 때문에 지나친 알리바이를 덜어낼 필요가 있다. <공명> <우리> 같이 미묘한 변주를 통해 작가 자신만의 작업양식의 방향성을 구축해나가야 한다.  
 작가는 동시대와 불가결한 존재이다. 과거 혹은 미래에 머무르는 유동적 존재가 아니다. 재현과 피상적인 존재에 대한 막연한 갈망은 작가 정신을 체계화 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는 끊임없는 장고를 통하여 자신만의 작업 양식과 다른 작가들과는 구분되는 명확한 예술철학을 가져야한다. 

이건형 2018.04.28